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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발매된 아이폰을 한국내에서 사용할 경우라면 크게 문제가 없겠지만
해외 여행시 아이폰으로 지도를 본다는것은 큰 모험이겠지요..
물론 로밍요금이 크게 상관없으시다거나 지도를 볼 일이 별로 없다면 문제가 아니겠지만요..
이번에 해외 여행을 다녀오게 되면서 아이폰용 오프라인지도에 대하여 이것저것 알아 봤습니다.
구글맵을 아이폰에 다운받아 사용하게 해주는 방법이 있는데 ( 일종의 캐쉬를 이용한 방법인듯 하더군요. )
구글맵이 업데이트 되면서 오류의 위험성과 잘 안될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정식 앱스토어 어플들과 Cydia 어플들을 찾아 보았지요.
1. Cydia 어플중 많이 알고 계신 xGPS의 경우엔 맵데이터를 구글맵을 사용합니다.
( 아시다시피 해외 구글맵의 경우 국내의 지도는 대충 나옵니다만
한국내에서 사용할 것이 아님을 전제로 하기에 일단 넘어갑니다. )
5월 현재 확인한 결과 국내 서비스 되는 지도로 보여지는군요.. ^^
사용상의 안좋은 점은
1.GPS가 활성화 된 상태에서는 화면의 가운데에 사용자의 위치가 나오게 되어 있어서 다른곳으로 움직여 보기가 힘듭니다.
2.두손가락 확대축소가 아닌 화면내의 + , - 아이콘을 사용하여 확대 축소 한다는 것
3.옵션부분에서 원하는 만큼의 지도를 다운받는 기능이 있는데 150메가 이상일 경우엔 안받아 진다는것이죠...
( 그럴경우 확대/축소 레밸의 양이 지극히 제한적입니다.. )
2번과 3번의 단점으로 인해 노가다 지도 받기를 해야 하는것이죠..
확대/축소,이동.. 확대/축소,이동... 그리고 로딩의 압박..
최근에 업데이트 되면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편합니다..
그래도 구글 맵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인것 같습니다.
2. 정식 앱스토어 어플인 OffMaps 입니다.
이 OffMaps 어플과 몇몇 어플의 경우 OpenStreetMap ( http://www.openstreetmap.org/ )을 사용합니다.
뭐.. 저작권문제 같은것 때문에 그렇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OpenStreetMap의 경우 지도가 썩 자세하지는 않다는(?) 것이겠지요.
( 어쩌면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 OffMaps의 경우도 최근에 업데이트가 되면서 지도 다운받기가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일부 유명도시의 경우 도시만 다운 받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지도 어플인지라 지도데이타의 효율성 문제가 제일 큽니다.
어쩌면 구글에 길들여져 있는걸까요? - -;
이렇게 두 어플다 어느정도는 다운로드의 작업을 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현지에 가셨을때 꼭 오프라인 모드로 해주셔야 하구요.
이 두 프로그램을 섞어 놓은 프로그램이 나온다면 좋겠군요.. ^^
구글 맵데이타의 전세계 지역명이 한글로 나오면 더더더더욱..
* GPS 트랙을 저장할 수 있는 어플도 같이 사용하신다면 나중에 귀국후에 다니셨던 곳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을실듯 합니다.. ^^
** 여담이지만 아이폰의 GPS 기능이 에어플레인 모드일때도 작동이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안되더군요.. - -;;;;
통신사와 연결이 된 후에야만 GPS가 작동되어 현재의 위치를 파악 하실수 있습니다..
에어플레인 모드가 아니라도 통신사와 연결이 끊어진 상태 ( 기지국과 만나지 못한 상태 )여도
GPS 작동이 안되는것 같습니다. ( 이부분은 좀더 확인을 해봐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
1. 헤어진 뒤에 남자가 술을 먹고 연락이 온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는 머리(이성)에서는 안 만나고 싶은데 가슴(감성)에서 만나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즉 여자 몸이 필요하거나, 일시적인 좋은 감정이 남아있는 경우입니다. 술 먹고 연락하는 남자는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네요. 100% 헤어지게 되어있습니다.
2. 술을 먹은 뒤에 사고가 많습니다. 남자는 술 취하면 이성으로 눌렀던 본성이 튀어나옵니다. 저도 술먹은 뒤에 이쁜 여자를 덥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20대가 있었습니다. 특히 여자가 술먹고 필름이 끊기는 상태면 날 잡아잡수하는 것입니다.무사하신 분들은 아주 행운이라고 생각하십시오.
3. 사귄지 600일 되었는데 남친이나 여친이 배반하였다고 흥분하고 분노하는 것을 봅니다. 첫사랑이 결혼하는 확률은 3%도 안됩니다. 지금 사귀는 사람과는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말이됩니다. 그리고 사귈때는 진심이지만 오래 사귀면 지겨워 집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부셔버리고 내일이면 벌써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돌보지 않는 나의 사람아.... 남자나 여자나 더 나은 사람이 나타나면 쉽게 잊어버립니다.
4. 헤어질 때 먼저 차는 것이 유리합니다. 차인 사람은 울고 불고 난리입니다. 먼저 차십시오. 애인이 먼저 차면 다시 사귀고선 다시 먼저 차십시오. 그러면 죽을것 같은 마음은 사라집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사귀십시오. 그러면 사랑이 이동하여 힘든 것은 없어집니다.
5. 남친이나 여친에게 올인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나에게 50% 투자하고 애인에게 40% 투자하고 나머지는 친구와 부모에게 투자하십시오. 애인에게 100% 올인하다가 헤이지니까 죽을 것 같죠. 주식투자에서 한 종목에 100% 투자하면 쪽박차기 꼭 알맞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잘못하여 놓고는 배신한 남자와 남편을 욕합니다. 여자님들은 남자에게 올인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가치는 자기가 높입니다. 남친과 남편은 언젠가는 떠나갑니다. 나를 위하여 항상 50%는 남겨두세요.
6. 그리고 저도 몰래 여자와 만났었는데 첫만남을 심심해서 식사나 하려고 만났다가 푹 빠졌었습니다. 머리에서는 헤어지라고 난리치고 가슴에서는 만나라고 난리치고... 헤어지는 것을 30번도 더하다가 겨우 헤어졌지만 그 사랑(?)의 감정 무섭습니다. 마음대로 안됩니다. 돈도 꽤 날렸습니다. 이성간에 빠진 감정은 참으로 통제불가능합니다. 함부로 남의 일에 욕하지 마세요. 정말 겁나는 감정입니다. 제 친구는 처녀와 사귀다가 처녀가 배반하고 총각과 도망가니까 살인까지하고 감?**?갔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재미보다가 떠나가면 보내줘야지 뭐하는 짓인가하고 말합니다. 잘못된 사랑의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킵니다.
이 게시판에도 그런 잘못된 사랑이 많습니다. 올인하면 모든 것이 마비됩니다. 특히 조심하십시오.
7. 남자는 여자를 만날때 사랑과 욕정이 적당히 섞인 상태에서 만납니다.
사랑이 깊으면 아껴주지만 그렇치 못하면 욕정이 앞섭니다. 이건 남자의 타고난 업보입니다. 남자 선수들은 여자의 심리상태와 몸의 상태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선수에게 걸리면 몸을 줄 확률이 높아집니다. 가짜 사랑인지 몸을 위한 사랑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남자는 진심으로 만납니다. 그러다가 남자들은 쉽게 실증을 냅니다 그리고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면 어린애처럼 거기에 푹 빠집니다.
그러면 여자입장에서는 배신이지요..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부셔버리고.. 내일이면 준 사람조차 잊어버린다고 생각하세요.. 남자는....
8. 한 물건(?)을 오래쓰면 지겨워지게 되어있고 소홀하게 되어있습니다.
물론 쓰면 쓸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사귀는 애인보다도 더욱 훌륭하고 잘생기고 돈도 많고 인간성이 좋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누구나 마음이 흔들립니다. 의리를 생각하여 평생 고생하시겠습니까? 잠시 아픔과 양심을 속이고 더 낳은 사람을 택하시겠습니까? 부모님들은 배반하라고 난리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하여 함부로 몸을 주는 경우는 없어야합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야 회수하면 흔적도 안남습니다. 여자가 먼저 남자를 잊지 못하는 경우는 지금 만나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됩니다. 지금 새로 만나는 남자가 마음에 들면 옛남자는 까맣게 잊지요. 그러나 몸의 흔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결혼해서도 맨날 비교됩니다.
9. 여자가 결혼할 상대를 구할 때는 먼저 그 집안을 보십시오. 이혼한 집안은 그 자녀도 그러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버지가 바람둥이면 그 유전인자가 남친에게도 유전되어 숨어있습니다. 그리고 일찍 요절한 집안은 당신의 남친도 그러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집안이 가난하면 남친도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니까 돈 많은 집안의 남친은 돈 벌수 있는 능력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까 남친 집안이 돈이 많다는 것은 남친이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성격과 능력이 좋아야 돈을 법니다.
물론 돈을 많이 벌면서 바람둥이거나 성격이 ***적인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적이면 그 아들도 ***적이기 쉽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유전입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더욱 높습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돈 많이 버는 남자가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다는 것입니다. 재수없으면 돈은 많은데 바람둥이에다가 ***적이기도 한사람도 있습니다. 남친부모님을 보시면 알수 있습니다
위의 경우는 여친을 사귈 때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어머니가 바람나서 이혼한 딸은 바람유전인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인생을 딸이 똑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이 글은 가난한 젊은이에게는 좌절과 분노를 주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피부에 와 닿는 현실로 다가오는 글일지도 모릅니다.)
10. 위의 말이 다 맞지는 않습니다. 그러할 확률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합니다. 남자에게 올인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여자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남친이나 남편이나 애인은 언젠가는 님의 곁을 떠나갑니다. 그날을 위해 올인하지 마십시오.
11. 일본의 긴자거리의 유명한 마담이 성공한 남자들을 접대하면서 공통점을 쓴 책이 있는데, 성공한 남자는 가정의 약속을 소중히 여긴답니다. 그 마담이 좋은 식사를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하면 아들과의 약속이 있어서 어렵다고 거절하는 것이 성공한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라고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아내와의 약속도 소중히 여깁니다. 아내와 여친과의 약속을 잘 어기는 사람은 성공할 가능성이 적은 남자입니다 혹시 성공하더라도 작은 성공만 합니다. 우리 회사에서도 그러한 사례가 입증되고있습니다
12. 전 지금 나의 인생 노후를 위하여 올인하고 있습니다. 그 올인 속에는 나의 아내가 1순위입니다. 가끔 맘에 없는 말을 하여 가슴을 아프게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제일 높은 값을 매기고 있습니다. 딴데가봐야 이만한 값어치쳐주는 남자와 여자가 없다는 것을 우린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In a cavern, in a canyon Excavating for a mine Lived a miner forty-niner And his daughter Clement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Clementine
Light she was and like a fairy And her shoes were number nine Herring boxes without topses Sandals were for Clement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Clementine
Drove her ducklings to the water Every morning just at nine Hit her foot against a splinter Fell into the foaming br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 Clementine
Ruby lips above the water Blowing bubbles soft and fine But alas, I was no swimmer So I lost my Clementine Oh,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Clementine
Then the miner, forty-niner Soon began to peak and pine Thought he oughta join his daughter Now he s with his Clement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Clementine
In my dreams she still doth haunt me Robed in garlands soaked in brine Though in life I used to hug her Now she s dead, I draw the line Oh, my darling, oh, my darling Oh, my darling Clementine You are lost and gone forever Dreadful sorry, Clementine
'클레멘타인' 유래 보기..
미국민요인 이 노래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깊은 계곡에서 광석을 캐는 광부/ 아버지는 포티나이너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다. '포티나이너(Forty-niner)'는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을 이르는 말로, 가진 것 없이 초라해져만 가는 자신을 자조하며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포티나이너(forty-niner)'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였다. '포티나이너'란 골드러시가 극에 달했던 1849년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로 몰려든 사람들을 말한다.
1848년 1월 23일, 캘리포니아 북부 아메리카 강변의 제재소에서 일하던 한 목수에 의하여 시작된 골드러시는 당시 미국 사회를 열병으로 끓어 오르게 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황금을 찾아 아메리카 강변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공무원도 있었고 신문기자도 있었으며, 군인, 의사, 판사 등 상류층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직장을 팽개치고 노다지를 캐기위해 서부로 서부로 향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신문사가 휴업을 하고,선원들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바람에 배가 운항을 중지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럽, 남미, 중국 등 외국에서도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광부가 되어 1848년부터 1858년까지 약 10년 동안 5억5천만 달러의 금을 캘리포니아에서 캐냈다. 이것은 지금 시세로 환산해 보면 실로 엄청난 액수이지만,'포티나이너' 모두가 거부의 꿈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포티나이너'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거친 노동과 빈약한 식사로 인한 영양실조와 인디언의 습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하루종일 뼈가 부서지게 일을하고서도 밤에 돌아가 쉴 곳도 마땅찮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허술한 막사에는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기 일쑤였고, 의복도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들이 피땀 흘려 캐낸 황금이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의 자본가들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허탈감에 사로잡힌 '포티나이너'들 사이에서는 자조적인 노랫가락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굴과 계곡에서 금맥을 찾는 한 포티나이너에겐 클레멘타인이라는 딸이 있었지...
이렇게 시작하는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는 '포티나이너'들의 슬픔과 눈물이 담긴 상실의 노래였던 것이다. 이 노래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3.1운동 직후라고 한다. 소설가 박태원에 의해 우리의 정서에 맞게 가사가 바뀐 이 애조의 노래는 당시 나라 잃은 슬픔에 절망하고 있던 우리 민중 사이에서 널리 애창되기 시작하였다.
2007년 04월 02일 (월) 15:15:02 임상현 sang0015@hanmail.net
[국민의 소리] 부천 순천향병원에서 팔골절 수술을 받던 부곡중 임모양(여.14)이 수술 3시간 만에 숨지자, 병원 로비에 시신을 안치하고 사망경위에 대한 시위를 벌인 상황에서, 4월 2일 새벽 5시 순천향병원에서 진압경찰 100 여명과 사설경호원 100여명을 동원하여 유족들의 동의도 없이 시신이 강탈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족 관계자와 병원측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임양은 지난 29일 낮 12시15분께 부천 순천향병원에서 전신마취를 한 상황에서 골수주사요법을 통한 오른팔(상완골) 골절 치유수술을 받던 중에 심장에 이상증세가 나타나 심폐소생술과 혈액투석기를 이용한 재생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망하였다고 한다.
유족 관계자들은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제시하면서 골수주사요법을 이용한 골절치유수술을 받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된 것은 있을 수 없는 의료사고이고 명백한 병원측의 중대실수이며, 더 나아가 위험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 과실치사이거나 미 검증된 치유방법을 사용한 임상실험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임양의 장례식을 무기한 연장하고 시신을 병원 로비에 안치하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사과를 요구하던 중 남아있는 유족들이 적고 지친 새벽시간을 이용하여, 기습적으로 경찰병력 100여명과 사설 경호요원 100여명을 동원하여 병원 시위물품을 철거하고 강력하게 항의한 유족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시신을 강제적으로 탈취하여 빼돌린 어처구니 없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여중생이 수술중 억울하게 사망하게 된 과정
임양은 부곡중학교 체육시간에 팔 굽혀펴기를 하다가 팔이 골절되어 순천향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담당의사는 팔골절 증상 이외에 양성종양이라는 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양성종양을 치유하는 방법은 1~2년 자연치유를 하든지 아니면 간단한 수술을 통한 치유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간단한 수술을 통한 치유방법을 종용하였다고 한다.
임양의 아버지는 양성종양이라는 단어를 듣자,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하여 이를 확인하고자 진찰기록을 가지고 ‘원자력 병원’에 의뢰를 하였다고 한다.원자력 병원 담당의사는 양성종양이라는 판단은 말도 안된 진찰이며 뼈가 골절된 상황에서 물이 모인 양상을 오진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단호하게 언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원자력병원에서 치유 수술을 받으려면 일정이 밀려 한 달이 걸리기 때문에, 양 병원의 선택을 두고 고민하다가 결국 시일이 빠른 순천향 병원을 택하였다고 한다.
수술을 하기 전날(3월 29일) 기브스를 풀고 진찰을 하였더니, 기브스를 한 부분에 약간의 염증이 발생하였다고 염증을 제거하기 위한 간단한 시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시술방법은 살을 째고 수술을 하는 것 보다 주사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다며 권유했기 때문에 간단한 주사 방법으로 하는 시술에 승락을 하였다고 한다.
수술 당일 오전(3월 30일) 이전 상담과 다르게 다리 부분에서 주사를 이용해 골수를 빼낸 뒤 골수이식 수술을 권유해 왔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추가적인 시술 방법론을 권유하였는데, 골수를 빼려면 무척 아프니 전신마취를 해야 한다는 설명을 했다고 한다.
수술 당일 예정된 시간보다 45분 일찍 보호자도 없는 상황에서 수술에 들어 간다고 하자 임양이 아버지에게 긴급하게 전화를 하여 불안한 상황을 하소연을 하였다고 한다. 급한 전화를 받고 병원에 달려왔으나 1~2분 차이로 임양은 수술실로 들어간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임양의 보호자되는 아버지에게 수술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하였는데,”이 수술은 맹장수술보다 더 간단하기 때문에 수술이라기 보다는 치료에 가까운 시술이기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수술을 받고 난 이후 오늘 저녁에 바로 퇴원이 가능하다”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
순천향병원의 의료사고 은폐 의혹
수술경과를 기다리려고 속속 모여든 가족들은 1시간이면 수술이 간단하게 끝난다는 수술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수술실에 들어가고 3시간이 흐른 뒤에 병원관계자들이 나와 심장에 이상이 생겨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으나, 생명에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청천병력과 같은 통보를 하였다고 한다.
5시간이 지난 뒤에 임양을 면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임양의 입에는 튜브가 채워진 상황에서 심폐기가 작동되고 있었으며 허벅지에는 피가 낭자한 상황에서 굵은 바늘로 혈액을 강제로 돌리는 혈액투석기가 작동되고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이 임양의 몸을 만져보자 얼음장처럼 차가웠으며 송장처럼 딱딱한 상태가 지속되었으며, 이때부터 사망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고 한다.
병원 관계자들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으니 하루를 더 지켜보자고 종용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쩔 수 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임양의 몸을 따듯하게 위장하기라도 한듯 새벽에는 침대 밑에 온풍기까지 설치하는 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임양의 모교인 부곡중 학생동료들이 찾아와 임양의 얼굴을 보고 우는 소리에 병원이 시끄러워 지자, 갑자기 아버지와 학생들에게 5분만 퇴장할 것을 요구하면서 강제로 밀치고 난 이후, 병원 관계자는 임양에게 설치된 각종 기구를 때고 영안실로 안치할 것을 명령했다고 한다.
순천향병원의 끝없는 변명과 횡설수설
당시 수술을 담당했던 채의사와 유가족 관계자인 문교수와 대담에서 다음과 같은 사망 경위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마취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수술도 정상적으로 끝났지만 혈압이 안 잡혀서 수술말기에 심폐소생술을 했다고 설명하였다고 한다.
심장쇼크로 사망하였는데 심장자체에 이상이 없으며 혈전의 영향으로 폐색전이 의심된다고 말하였으며, 폐색전은 주로 노인에게서 발생하는데 아동은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발생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임양의 경우에는 일반적 골절과 다른 양상이며 매우 특이한 체질이어서 그런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한편, 의료사고를 잘 아는 한 전문가는 “사망을 은폐하기 위해 사망한 상태에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살아있는 것으로 꾸미는 경향이 많다”고 언급하였으며, “심폐술인 경우에 불과 몇 분 내에 소생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에서 하루를 심폐소생기를 작동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언급하였다.
병원관계자는 “수술동의서를 받은 이상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말하였으며, ”임양의 죽음은 의료사고가 아니라 알 수 없는 질병이거나 특이한 체질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는 상황이다”라고는 원론적인 답변을 들어야 했다.
명백한 의료사고 가능성 의혹 증폭
순천향병원의 알 수 없는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다른 병원의 모 의사에게 문의를 하였다. 모 의사는 “의료사고가 발생하면 유가족은 일체의 환자를 치료한 병원자료를 넘겨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자세한 판단은 자료를 검토해 보아야 알지만, 기본적인 상식에서 살펴본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모의사는 “엑스레이나 MRI등을 판복함에 있어서 여러 원인으로 오진이 나올 가능성이 많으며, 운동하다가 다친 팔골절을 가지고 양성종양으로 판독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언급하면서 오진가능성의 견해를 밝혔다.
또한, “뼈에 물혹 같은 증상이 있는 증상을 가진 환자가 자기 몸의 골수세포를 주사해서 치유하는 방법은 논문 등에 나오는 등, 새로운 치유방법으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지만, 오래된 정형화된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의료사고의 개연성은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임양이 갑자기 죽은 이유에 대하여 “ 골수주사를 잘못 놓게 되면 골수가 혈액을 타고 유입되어 폐를 막아 폐색전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많다”라고 언급하면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이라고 언급하였다. 순천향병원의 담당 의사가 말한 “특이체질론”이나 “노인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패색전증”은 너무 희박하며 수술 중에 혈액을 타고 침투한 골수로 인한 패색전증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고 언급하였다.
종합적으로 평가를 내리면 “성체줄기세포의 한 분야인 골수를 이용한 시술은 아직 검증되어야 할 분야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방법을 사용하든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든 언제든 위험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이번 사건도 이러한 연장선에서 발생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위험고지가 되지 않았다’라는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충분한 위험고지가 없다면 병원측은 책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언급하였다.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치료방법이 아닌 아직 정착이 덜된 치유방법이거나 새로운 임상실험 가능성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고 언급하였다.
의료사고에 대해서 잘 아는 관계자는 “ 일반 환자들에게 검증되지 않는 새로운 치유방법을 속이고 시술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언급하였다.
골수이식 분야는 조혈모세포나 성체줄기세포에서 인간에게 임상실험을 하다가 죽어 의료사고 분쟁이 일어난 일은 사례가 있으며, 성체줄기세포를 가지고 임상실험을 하다 2명이나 죽은 서울대 병원의 문신용교수의 사례를 들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판단하면 인체에 대한 생명의 위험성이 검증되지도 않는 골수관련 수술에 대한 위험성은 상존하기 때문에 새로운 임상실험의 가능성은 항시 상존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의료사고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서울대 김윤 교수는 한 해 평균 의료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적게는 4천명에서 많게는 2만7천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의료사고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피해를 당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유가족 해산시도와 시체 강탈을 시도한 부천 순천향병원
부천 순천향 병원은 유가족 관계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면서,시신을 병원 로비에 안치하고 연일 시위를 하자 어떤 대응도 없는 상태에서 지켜보다가 취재기자들이 찾아오고 인터넷에 임양의 사건이 유포되자, 이를 수습할 목적으로 마지못해 병원원장은 사과를 하였지만 유가족들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면서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찰의 비호아래 경호원들이 강제적으로 시신을 탈취하는 장면
유가족의 권한인 부검검사를 누가 할 수 있다던가!!
4월 2일 부천순천향병원 6주년 행사가 임박하자 이를 해산할 목적으로 부천 중부경찰서에 사건 접수를 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요일 낮에 경찰이 몇 번 탐문하는 분위기가 있자, 유족 관계자들은 경찰이 새벽을 이용하여 해산을 시도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보였다. 불안감은 예상대로 적중되어 새벽 5시를 기해 갑자기 전경 100여명과 병원측에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사설경호원 100여명이 유가족 20여명을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시체를 탈취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에게 물리력으로 제압하고 시신만 신속하게 강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시신을 강탈하는 현장은 아비규환의 현장 그 자체였다. 가족들의 오열과 절규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유족 어머니처럼 보이는 분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실신하였으며, 유족 아버지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다. 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은 듯 정신적 공황을 보였다.
유족들이 진압경찰에게 “왜 시신을 강제로 빼앗아 다른 곳으로 옮겼느냐”는 유족들의 항의에, “ 병원측의 요청으로 인하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로 옮겼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이런 답변에 유족들은 “당신들은 유족들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고 했느냐”라는 항의에 답변다운 답변을 하지 못하였다.
유족들은 지금 이시간 병원측과 협상에 돌입하였지만, 사망원인 규명과 책임자 사과등을 요구하면서 이를 관철할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언론과 시민들의 절실한 도움을 부탁한다고 말하였다.(유가족 관계자: 010-7750-0150 )
만일 부천 순천향 병원에서 임양에 대한 사망 의혹을 밝히려고 했다면, 먼저 유족에게 부검을 하자고 요구하였겠지만, 서둘러 영안실로 옮겼다는 사실과 개원 6주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새벽에 유가족 해산을 시도했다는 사회적 비난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부천 순청병원 의료사고는 공중파 3사와 10여개 언론매체에서 취재를 했지만,보도통제가 된 것인지 모르지만,일체 보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뿌리깊게 존재한 “의료 카르텔과 국내 기득권의 매카니즘”을 이해한다면 충분한 개연성이 있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맹장수술보다 쉽고 수술이기 보다는 차리라 치료라고 주장하던 주사요법 시술로 수술 5시간만에 사망했던 의혹, 죽음을 은폐하고자 위장했던 24시간의 행각, 그리고 아직 정형화되지 않는 치료방법을 통한 시술, 성체줄기세포의 한 분야인 골수치료에 대한 새로운 부작용 노출, 더 나아가 임상실험에 사용되었다는 의혹등이 일어나는 가운데 상당부분 사실로 밝혀지는 과정에서 만일 상상하기 힘든 임상실험의 가능성까지 밝혀진다면 한국 의료계는 물론 한국사회는 커다란 파문이 일어날 것이라 본다.
어떤 부분까지 사실로 밝혀지더라도 충분한 위험고지가 없는 상황에서 의료사고가 나자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유가족의 시신을 물리력으로 동원하여 강탈했다는 사실 자체가 법적인 문제를 떠나 도덕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소리=임상현.장수임.박정철]
STEVE JOBS TO 2005 GRADUATES
'STAY HUNGRY, STAY FOOLISH'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원문보기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오늘 세계 최고 대학 중 한 곳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한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오늘이 대학 졸업식에 가장 근접해본 것입니다. 오늘 저는 내 인생의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단한 얘기는 아니구요. 오직 세 가지 얘기일 뿐입니다.
첫번째 얘기는 점을 잇는 것에 대한 얘깁니다.
나는 리드 대학(미국 오레곤주에 있는 명문 대학-역자 주)을 6개월 다니다 관뒀습니다. 그러나 18개월간인가 대학 안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진짜 그만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이야기입니다. 내 생모는 어리고 미혼이었던 대학생이었고, 나를 입양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약속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변호사 부부는 마지막 순간에 "딸을 원한다"며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나의 양부모는 한밤중에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원치않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이를 입양하시겠어요?" 양부모님은 "물론이죠"라고 말했습니다.
나의 생모는 그러나 나의 양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양부는 고교도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그래서 입양서류에 사인하길 거부했습니다. 몇 개월 뒤 그녀는 나의 양부모로부터 나를 꼭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야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그리고 17년 후 나는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만큼 학비가 많은 대학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에 불과했던 나의 양부모의 저축은 내 학비로 다 지출됐습니다. 6개월이 지난 뒤 나는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고 대학이 그 길을 찾는 데 뭘 해줄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을 써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를 그만뒀고 그래도 괜찮을 거라 믿었습니다. 당시엔 좀 무서웠죠. 그러나 되돌아보면 대학을 관둔 것은 내가 평생 했던 결정 가운데 최고 중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자 나는 흥미없는 필수과목을 듣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리고 재미있어 보이는 과목들을 청강했습니다.
그런 생활이 낭만적이진 않았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방이 없어서 친구들 방의 바닥에서 잤고 5센트짜리 빈 콜라병을 모아서 음식을 사먹었으며 헤어 크리샤 사원에서 주는 좋은 식사를 일주일에 한번 얻어먹기 위해 11km나 걸어갔습니다. 그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가다 부딪힌 것들은 나중에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자산이 됐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당시 리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서예 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내의 모든 포스터와 서랍에 붙은 레이블은 전부 서예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글자들이었습니다. 학교를 관두고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나는 서예 과목을 들었습니다. 나는 세리프체와 산 세리프체에 대해 배웠고 서로 다른 활자체들간 공간을 다양화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훌륭한 서체를 만드는가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매력이 있었고 그것은 과학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매료됐습니다.
이것이 실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희망을 주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 매킨토시 컴퓨터를 디자인할 때, 이 경험들이 다시 내게로 왔습니다. 우리는 맥 안에 이 모든 것을 디자인해 넣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첫 컴퓨터가 됐습니다. 내가 그 대학의 전공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매킨토시는 결코 그렇게 다양한 서체를 가지지 못했고 균형잡인 폰트를 얻지도 못했을 겁니다. 윈도즈는 매킨토시를 베꼈기 때문에, 어쩌면 PC가 그런 서체를 가지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서예 과목을 청강하지도 않았고, PC도 그런 서체를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생일 때 앞을 내다보며 이런 점들을 이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에 되돌아보면 아주아주 뚜렷하게 점들이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래를 내다보며 점들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뒤를 보며 점들을 이을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그 점들이 언젠가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 이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뭔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배짱, 운명, 인생, 업(業), 뭐든지 말이죠. 이런 사고방식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변화시켜왔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인생에서 사랑할 일을 일찍 찾은 것은 저에게 행운이었습니다. 나는 스무살 때 아버지의 차고에서 워즈와 함께 애플을 시작했습니다. 우린 열심히 일했고 10년 후 애플은 차고 속 단 두명에서 20억 매출을 올리는 직원 4000명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 전해에 우리는 매킨토시라는 훌륭한 제품을 내놓았고 나는 막 서른살이 됐습니다. 그리고 나는 바로 해고됐습니다.
어떻게 내가 설립한 회사에서 내가 해고될 수 있는가? 글쎄요, 애플이 커가면서 우리는 회사 경영에 재능이 있어보이는 어떤 사람을 고용했고 그 첫해에는 모든 게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결국 갈라섰습니다. 그때 우리 이사회는 그 사람을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서른살에 나는 쫓겨났습니다. 아주 공개적으로 쫓아냈죠. 성인이 된 뒤 내 인생 전체가 사라져버렸고, 그건 정말 황당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달간 나는 뭘 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나는 내 이전의 기업인 세대들을 내가 물러나게 했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받았던 바통을 또 넘겨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데이빗 패커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 엉망진창으로 만든 모든 것을 사과했습니다. 나의 실패는 무척 공개적인 것이어서, 실리콘밸리에서 달아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뭔가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고 내가 해왔던 것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았습니다. 애플에서의 일은 그걸 조금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나는 쫓겨났지만 아직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땐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것은 지금껏 내게 일어난 일 중에서 최고의 일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성공이라는 무거움은 다시 시작한다는 가벼움으로 대체됐습니다. 물론 모든 것에 대해 확신도 적었죠. 그것은 나를 내 인생 최고의 창조적인 시기로 밀어넣었습니다.
다음 5년간, 나는 넥스트라는 회사와 픽사라는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가 된 정말 놀라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죠.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이제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런 굉장한 일들 속에서 애플은 넥스트를 인수했고, 나는 애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넥스트에서 우리가 개발한 기술은 애플이 현재 누리고 있는 르네상스의 심장이 됐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나는 정말 행복한 가족이 됐습니다.
나는 내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건 정말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였던 내게는 정말 필요한 약이었던 것입니다. 때로 인생은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때립니다. 믿음을 잃지 마세요. 나는 나를 전진시킨 유일한 힘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내가 사랑했다는 점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들도 사랑하는 것을 찾으세요. 연인을 찾을 때 진실하듯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은 인생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해내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런 일을 못찾았다면, 계속 찾으세요. 안주하지 마세요. 그것을 찾았을 때, 당신의 심장이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관계도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 찾아다니세요. 주저앉지 마십시오.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겁니다.
열일곱살 때, 나는 이런 식의 인용문을 읽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의 인생이 분명히 옳은 삶이 될 것이다." 매우 인상적인 경구였고, 그로부터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내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가 죽기 전날이라 해도 나는 오늘 내가 하려 했던 일을 할까?" 그리고 그 대답이 "아니"였던 날이 너무 오래 계속되자, 나는 뭔가 바꿔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가 곧 죽을 것임을 기억하는 일은, 내가 큰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모든 자부심, 모든 공포와 참담함 또는 실패--이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일만 남았습니다. 내 생각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뭔가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의 덫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발가벗었습니다.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1년 전쯤 나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나는 오전 7시30분에 스캔을 받았고 췌장에 뚜렷한 종양이 보였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내게 불치의 암이 거의 확실하다며 3개월에서 6개월을 못넘길거라고 말했습니다. 내 주치의는 집에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죠. 그건 죽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간 말해줘야 할 것을 몇 달 동안 다 말해야 한다는 것이죠. 모든 걸 잘 정리해서 가족들이 사후처리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구요. 곧 완전한 작별이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날 나는 그 진단만 하루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와 창자를 거쳐 췌장의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침착했습니다. 그러나 의사의 설명을 들은 내 아내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들이 난리가 났어! 수술하면 치료할 수 있는, 아주 드문 췌장암이래!" 나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 괜찮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경험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십년간도 그것이 유일한 경험이길 바랍니다. 그런 일을 겪었기 때문에 죽음을 유용하지만 순전히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는 약간 더 확실하게 말해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치 않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조차 그곳에 가려고 죽고 싶어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죽음은 우리 모두가 맞을 목적지입니다. 아무도 그로부터 피하지 못했죠. 그리고 죽음이야 말로 삶의 가장 훌륭한 발명품이기 때문에 그래야만 합니다. 죽음은 삶을 교체해주는 매개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낡은 것을 거두어들이죠. 지금 이 시각, 새로움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나 멀지 않은 미래 언젠가, 여러분들도 차차 늙을 것이고 사라져갈 것입니다. 연극 같은 얘기여서 미안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은 제한돼있습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낸 결과에 얽매어 사는 도그마에 갇혀있지 마세요. 다른 사람의 의견이 여러분 내부의 목소리를 잠식하도록 놔두지 마세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슴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가슴과 직관은 여러분이 진실로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지구 카탈로그>라는 굉장한 책이 있었습니다. 제 세대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책이었죠. 그 책을 쓴 사람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 팍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양반인데, 시적인 감성으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1960년대 후반이니, PC도 있기 전이고 컴퓨터 출판도 없어 모두 타자기와 가위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만든 책입니다. 어떻게 보면 책으로 만든 구글 같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에 이미 나온 것입니다. 그 책은 무척 이상적이고 훌륭한 도구들과 굉장한 개념들로 가득찬 것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지구 카탈로그>를 여러 판에 걸쳐 내놓았고, 모든 것이 완성됐을 때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그게 1970년대 중반이고, 그때 제가 여러분들 나이였습니다. 그 책 최종판 뒷표지에는 무전여행때 히치하이킹을 하곤 하는 이른 아침 시골길과 비슷한 길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밑에 이렇게 써있죠. "늘 배고프라. 늘 어리석으라(Stay Hungry. Stay Foolish)."
그것이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였던 것이죠. Stay Hungry. Stay Foolish. 그리고 나는 내 자신에게 늘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이제 새 출발을 위해 졸업하는 여러분들께 이 말씀을 해드리겠습니다.